지침 실망 않기
지침은 어디에나 있다. 엘리베이터에 붙은 공고문, 택배 상자 속 가구 조립 설명서, 회사 외장하드에 담긴 업무분장 파일처럼, 지침은 곳곳에서 각각 원활한 의사소통을 돕는 길잡이 역할을 자처한다.
하지만 손쉽게 뜻이 통하리라는 기대와 다르게 지침은 오해를 부르곤 한다. 모호한 도식, 동음이의어, 오탈자는 지침의 목적을 흐린다. 효율을 따르던 지침은 원칙을 벗어나 공허한 외침으로 남는다.
실망 않는다. 부실한 정보를 처리하는 데 시간이 걸릴수록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해석 범위가 넓어지면, 지침은 편지도 스무고개도 될 수 있다. 지침 속 보이지 않던 감정과 관계도 드러나기 시작한다.
지침이 흘러가는 양상을 지켜본다. 달리 뾰족한 수 없이, 무뎌진 지침을 모으고 번역한다. 비효율에 골몰하고 무력에 몰두하며, 오해하고 실패하며, 서로를 살필 방법을 찾기 위한 요령을 고민한다.
원활한 소통 체계 이면에 엿보이는 관계와 기분을 다룬다. 공고문, 지시문, 안내문과 같이 지침이 작동하는 현장에서 과업을 정하고 수행해왔으며, 시도하고 실패하는 과정을 하나의 프로젝트로 꾸린다.
단체전
2023 장래식(場來式), 서교예술실험센터, 서울
내일은 우리가 떨어져 걷는다 해도, 온수공간, 서울
상히읗 온 투어: 셀링 픽처, 에스팩토리 D동, 서울
홈 스위트 홈, 플로어, 서울
2022 웨이팅 룸, 수치, 서울
애정의 총체적 난국, 종이잡지클럽, 서울
요정빵의 맛, 마포아트센터, 서울
2021 31회 한일작품교류전, 오사카예술대학 예술정보센터 전시홀, 오사카, 일본
리서치 프로젝트 및 기타
2023 누비는 몸 용기 설치 잔치, 서교예술실험센터, 서울
2022 보푸라기 부풀리기 사랑으로, 서교예술실험센터, 서울
제19회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부대행사 선착순 상영회, 서울아트시네마, 서울
선정 및 기타
2023 서교예술실험센터 공동운영단 11기 기획사업 노드형 네트워크 '多-단계', 서울문화재단
2022 서교예술실험센터 공성장형 예술실험지원 ‘링크’, 서울문화재단
마포문화재단 자치구 생활문화 활성화 지원사업, 서울문화재단
예술가 창작 활성화 청년예술가 지원사업, 마포문화재단
학력
2023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예술학과 학사 졸업
숨구멍은 순정이다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근무하는 소장님, 반장님, 미화 선생님에겐 살피는 마음이 있다. 세 사람은 반복되는 일과의 틈새에서 긴 호흡으로 즐거움을 찾고 흐름을 돌본다. 나는 빗겨 서서 틈을 내는 이들에게 묻어나는 관록을 본받고 싶었다. 자신만의 매뉴얼을 만드는 연륜, 맞닥뜨린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힘, 후임을 자처해 배우기로 한다. 인수인계를 받기 위해 인턴으로 세 사람을 따라 센터 곳곳을 관리한다. 구석구석 숨쉴 틈을 모색하며 일감도 찾는다. 숨구멍으로 틈바람이 침투해 바람길을 냈다고, 센터를 환기하고 지속해 왔다 믿고 움직인다. 소장님 휴무일인 화요일, 선임 틈에 섞여 센터를 촬영하며 묻는다. 세상에 필요한 매뉴얼은 무엇일까.
엇박자를 읽는다 비둘기가 난다 손짓을 본다
아파트에 수상한 공고문이 붙었다. 실수인지 의도인지 모를 글을 들고 여럿이 모였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공고문을 해석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 본다. 영 시원치 않다. 말은 산으로 가고 손은 허공을 가른다. 어물거릴수록 대화에 공백과 허점이 생긴다. 어울릴 수 없는 빈 구석에서 무엇을 공유할 수 있을까? 어우러지지 않는 대화를 되감으며 부족한 정보를 앞세우고, 의사 전달을 방해하는 요소를 드러낸다. 소통을 흩트릴수록 처리해야 할 정보량은 불어나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늘어나지만, 그럴수록 해석할 수 있는 범위는 되려 넓어진다. 길어진 영상 러닝 타임 만큼, 여지를 늘려 서로 맞댈 방법을 찾는다.
헤아리는 공
아파트 단지에 ‘중앙광장’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네 개 건물 사이 한가운데인 이곳에서는, 공놀이 문제로 수 년째 주민 갈등이 끊이질 않는다. 집 밖 ‘중앙광장’에서 공을 가지고 노는 소리가, 단지 구조 상 집 안 누군가에겐 소음이 될 수밖에 없어서 그렇다. 별다른 수없이 갈등만 쌓여가던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 공고문이 붙었다. 서로 마음을 헤아려 주기를 바란다 고 했다.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다. 마음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 까. 속마음은 겉으로 드러나 티가 나곤 한다. 마음이 묻어나기를 기대하며, 여러 몸이 단지를 가로지르는 일요일,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는 날에 주민들을 기다린다. 택배 상자를 가지고 나오면 손길이 닿은 자리를 살핀다. 흔적이 묻어 있는지 확인하고 가지고 온다. 미루어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상자를 빚고 굴리며 마음을 전할 ‘추가 시간’을 궁리한다.
도브 레터
에어컨 실외기를 집 밖에 두는 ○○ 아파트. 주민들은 실외기 틈새로 날아드는 비둘기를 각가지 방법으로 쫓아낸다. 이곳에 사는 나는 주민들이 사용한 방법을 참고해, 비둘기를 내쫓지 않는 윗집에 ‘퇴치키트’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어떤 방법이 좋을지 고민하다 주민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하지만 잘 퇴치했는지, 비둘기 없이 잘 지내는지 묻는 낯선 사람에게 답하는 이는 거의 없다. 그렇게 조언은커녕 인사조차 어려운 이곳에서 촬영한 ‘퇴치키트’ 제작기는 결과물보다 잠시 나눈 모호한 말, 미묘한 심리에 집중하며 실외기 너머 사람들과 대화하려는 고군분투기가 된다. 마음 같지 않은 상황은 이어지고 말을 주고받으려는 도전은 거듭 실패하지만, 껄끄러운 순간들 사이에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대화를 이어간 순간도 남아 있다. 일련의 순간들을 한데 모아 부친 편지, ‘도브 레터’를 통해 일상 속 문젯거리를 연결고리로 삼아 타인에게 가닿을 방법을 살피고 소통하기 위한 틈새를 내려고 한다.
안부 인사
2019년부터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붙은 공고문을 촬영해왔다. 정적이 흐르는 엘리베이터 에서 외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공고문을 사진으로 간직했다 꺼내 보곤 했다. 지루한 안내 사항과 뻔한 인사말, 엇비슷해 보이지만 일련의 사진에는 낱장으로 볼 때 드러나지 않는 흐름이 담겨 있다. 누군가 보내온 생활의 시간, 공간에 담긴 숨은 서사는 무미건조한 문서를 부드럽게 잇는다. 안부를 주고받듯이 손으로 액정을 훑으며 공고문을 읽었을, 읽 을 이를 떠올린다. 각도, 밝기, 노출, 선명도를 조절하고 인쇄도 다시 한다. 손수건 끝단처 럼 마감한 천 조각 공고문에는, 손쉬운 통보 수단에 없는 구구절절이 있다. 단지 바깥에 소식이 닿도록 전시하며 내부 사정을 외부에 공개해 뒤늦은 안부 인사를 건넨다.